달성에서 동성로까지
우리얼 2007.11.05
하늘이 흐리더니 빗방울까지 듣는 아침. 머리맡을 밀고 들어오는 선듯한 기운이 아직 어스럼한 새벽잠을 끌고 나간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며 어두운 방안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든 생각. '아 오늘 답사지' 오랫만에 오래동안 걸어야하는 답사길이었지만, 아침에 예정된 일들이 너무 많아 잠깐 생각을 추스려본다.
생각보다 빨리 끝나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의 일을 마치고 두어통의 전화를 받고(답사지 설명을 해 줄 사람이 안 나왔다고 대타를 해 달라고한다. 두어해전에 만났던 그를 생각하며 '그럴 사람은 아닌데..' 라고 언듯 생각을 하며 제시간에 맞춰 가지 못하는 사정이 못내 미안하다.) 서두른 것이 12시였다.
거의 20년만이었던 것 같다. 달성'공원' 이라는 이름으로 더 기억에 남아있는 달성을 가 본 것이. 기억속의 달성은 어린이날의 화려함과 2m가 넘는 장신에 수염이 멋진 아저씨, 그리고 어느 영험한 산속에에 도를 깨우치고 나온 도사들과 장꾼들, 뱀꾼들, 야바위 아저씨들이 큰길에서부터 공원 앞까지 가득차 있던 곳 이었다. 그 곳에선 도복을 입은 아저씨들의 기합소리가 울려퍼지고, 만병통치약이라 외치는 아저씨들이 둘러선 사람들속에서 징그러운 벌레를 끄집어내기도 하면서 박수갈채를 받던 곳이었으며, 세상의 모든 신기한 마술과 요술이 모이는 곳이었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신기하고 번잡하던 거리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골목길은 한산하고, 시끄럽던 흥정은 나지막한 장기알 두는 소리와 할아버지들의 담배연기로 바뀌었다. 그 옛날 유명했음직한 가게들은 점심 한끼, 추억의 별식을 먹기위해 찾아온 이들이 서넛 둘러앉았고, 화려하던 시계방들은 고장난 옛시계를 고치는 작고 어두운 가게들로 바껴버렸다. 거리도 사람처럼 시간이 부여한 나이를 먹어버린걸까? 한적하고 가라앉은 골목길은 지난날의 화려한 추억에 잠겨 시간을 거슬러버린것만 같다.
아침일찍 먼저 달성을 답사했던 사람들을 만나 점심을 먹기위해 서문시장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달성입구에서 서문시장을 향해 길을 건너기 전 오른쪽으로 시외버스정류장이 있었던 언덕길이 있다. 옛날 성주이며 안동장을 거쳐온 장돌뱅이들이 털털거리던 시외버스를 타고 한 가득 실고 온 짐을 내리던 곳. 명절이면 성주, 왜관, 안동의 골짜기에서 꼬깃꼬깃한 쌈지돈을 쥐고 서너시간을 달려와, 지난 1년동안 보아두었던 물건을 한가득 보따리에 묶어놓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먼동네 이웃들과 수다를 나누던 곳이 바로 거기 있었다. 어머니의 큰 보따리와 함께 시골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어렴풋한 기억들이 자리잡았던 그 언덕은, 지금은 그냥 시내버스가 쿨럭거리는 기침을 하며 올라가는 평범한 길로 변해 버렸다.
언덕아래 보리밥뷔붸에서 점심을 먹고 서문시장을 가로질러 가기로 했다. 시장 한 켠, 경제력이 다 한 노인들의 오래된 단골집은 생기롭지 않다. 너무 싼 가격에 놀라는 우리와 달리, 갑자기 몰려든 젊은 사람들에 놀라는 그 이들을 보면서 시간의 주인에서 물러서버린 골목길의 풍경이 가슴속에 찬바람을 들여놓는다.
시장국수길을 지나, 주단점과 포목점 구역을 거쳐 년전에 큰 불이 났던 2지구를 지나 어물전 쪽으로 향했다. 길을 걸으며 서문시장과 화재에 얽힌 전설같은 이야기가 오갔고, 소방서를 짓게 만들 사연들이 곁들여진다. 시장을 지나온 사람들의 손엔 과자봉지와 됫박으로 덜어내 파는 사탕이 한 봉지씩 들렸다. 아기주먹만한 눈깔사탕 한움큼, 길에서 금방 튀겨낸 튀김 한봉지, 그리고 존뜩한 땅콩캬라멜도 봉지째 손에 따라온다.
동산쪽으로 시장을 나서면 오른편에 신명학교와 함께 영남지역 최초의 근대사학이었던 계성고등학교가 있다. 1906년 개교한 이래 소설가 김동리와 아동문학가 김성도, 시인 박목월을 배출했던 학교에는 100년의 시간을 지켜낸 건물들이 먼저 한가한 일요일을 지키며 손님들을 맞는다. 핸드슨관 옆으로 자리잡은 교회 2층의 창틈으로 찬송가를 연습하는 목소리가 피아노 소리와 함께 흘러나오고 있고, 가을빛이 들기 시작한 나무들은 아담스관, 핸더슨관, 맥퍼슨관의 담쟁이 덩굴과 함께 오래된 시간이 주는 친근함으로 다가선다. 아담스관에서는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문을 지하실에서 몰래 등사하며 대구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다던 신명학교 여학생들의 하얀 처마저고리와 경북고, 계성학교 학생들의 뜨거운 기운이 아직 남은 듯하여 자꾸만 벽을 만져보게된다.
한동안 벤취에 함께모여 누군가가 시작한 종교와 인간에 대한 고찰과 영화 속의 기독교적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시장통을 지나며 하나씩 집어 왔던 알사탕이 건네지고, 저마다 싸 온 간식거리가 손과 손을 건너간다. 개성있게 만들어진 답사자료집이 사람들의 눈도장을 받고, 목에 걸린 명찰들이 나란히 누워 솜씨를 자랑하는 시간도 잠깐, 다시 무거워진 엉덩이를 털고 약속시간에 맞춰 살트로수녀원으로 향했다.
살트르수녀원은 서문시장 네거리를 건너 계명예술대학쪽으로 가는 길 동네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1915년에 세워진 수녀원에는 당시의 성당이 거의 원형의 모습을 하고 남아있다. 어릴적 누군가의 손을 잡고 꽃들이 가득한 긴 담을 따라 갔던 기억이 수녀원으로 가는 골목길을 들어서며 어렴풋이 그려진다. 그때의 기억엔 좁고 긴 골목길과 이름모를 꽃들이 담을 타고 넘어 길을 가득메웠었는데 지금은 꽤 넓은 길로 바껴있었다.하지만 그때의 꽃향기는 여전하다.(수녀원 한켠의 정원에 자리했던 향기로운 그 꽃나무의 이름을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이름을 몰라도 수녀원에 머물었던 짧은 시간동안 보았던 100여년전 낮선 나라 낮선 땅에서 시작했던 수녀님들의 아름다웠던 삶이, 그 향기를 만들어내지않았을까 상상을 하게 만든다.)
수녀원에는 하얀머리의 고운 수녀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성당을 담당한다는 노수녀님의 안내로, 수녀원의 역사와 수녀님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두어시간동안 듣는 기회를 가졌다. 100여년전 먼 타국땅으로 와서 40명의 고아들로 시작한 봉사의 삶, 전쟁과 혼란기를 거치며 걸어온 수녀원의 역사, 그리고 10여년의 시간을 거치고서야 비로서 한 사람의 정식수녀로서의 삶을 살게된다는, 진지하고 의미있는 이야기들이 수녀원을 한바퀴 돌아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수녀님과의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수녀원 건너편의 성모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모당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앞 잔듸밭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의 나즈막한 기도소리가, 처음 찾아간 우리들의 옷깃을 절로 여미게 만든다. 성모당 옆으로 자리잡은 천주교 신자들의 묘지에서 저마다의 짧지않는 상념에 잠겼던 사람들을, 늦은 오후로 향하는 시간이 깨우며 발걸음을 재촉하게 한다.
다시 큰 길을 건너, 몇해 전 대경지역 우리얼도 함께했던 민족시인 이상화의 고택을 지나, 선교사 언덕으로 불리는 동산으로 올랐다. 몇몇의 사람들은 계성학교를 나온 독립만세운동의 주역들이 경상감영으로 가기위해 넘었다는 90개의 계단이 있는 3.1운동 골목길을 밟아간다.
1899년 미국인 선교사 아담스와 존스가 달성서씨 소유의 민둥산이던 언덕을 사서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선교기지로 삼았다는 동산은,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있다. 당시 그들이 만들었던 지금의 동산병원을 내려다보며, 그들이 살았던 세채의 집이 박물관으로 남아있고, 또 다른 한쪽으로 대구사람보다 더 대구사람을 살랑하며 열정적인 봉사의 삶을 살았던 그들의 묘지가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동산에는 그들의 삶 외에도 대구를 사과의 고장으로 유명하게 했던 국내최초의 서양사과나무 식재터가 있고, 현재명과 함께 계성학교를 다니며 이 언덕에 올라 '동무생각'을 작사했다던 박태준을 기리는 표석이 나란히 서있다.
어두워져오는 하늘을 보며, 사람들과 단체사진을 찍고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과 뒷풀이에 함께 할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아쉬운 작별인사를 뒤로하고 사람들은 동산을 내려와 시내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구매일신문사 옆에 자리한 계산성당을 지나오며, 백년 전 대구읍성의 추춧돌을 만져보기도 했고,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진 성당을 장식한 스테인드그라스의 화려함에 눈길을 주기도 했다. 성당을 가로질러 약전골목을 지나면서 화교소학교의 축제를 알리는 장식과 함께 개화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이 거주했던 중상들의 도시 대구가 가졌던 개방성과 현재의 폐쇄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고, 대구읍성의 철거와 일본 상인들과 결탁한 반민족행위자 박중양과 해방 후 반민특위의 해체에 대한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약전골목 한켠에 있었던 대구읍성 남문자리를 알리는 표석과 마음따뜻한 명의로 이름났던 한약방 주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어지며 골목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를 떠돌았다.
진골목길을 지나 대구의 중심가인 중앙로를 건너면서, 몇 년만에 접하는 대구의 젊음을 구경했고, 국채보상운동공원 앞 찻집으로 향하던 길에 만났던 B-Boy들의 길거리 시합에 발걸음을 멈추고 함께 소리를 지르고 박수도 치면서 달성에서 동성로까지의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우리얼 제532회, 대경 제60차 대구골목길 답사 ] 도시를 걷는다, 거리를 즐긴다. 07/09/30 - 07/09/30 09시30분 - 11시30분 니가 달성이더냐!!! (달성걷기,관풍루,향토역사관) 12시00분 - 12시30분 성돌을 찾아볼까? 근대사학 건축지역 (핸더스관, 아담스관) 14시00분 - 16시00분 도시속 고요한 곳 / 근대종교 건축지역 (90계단,동산 선교사관, 성모당, 살트르 수녀원 등) |
* 1. 달성 이라는 이름은 옛날 대구를 달구벌(達句伐), 달구불(達句火), 달벌(達伐), 달불(達弗)이라 표기한데서 비롯되었는데 높은 평지, 부락, 도성의 뜻인데 부근의 각종 출토물로 보아서 이곳이 선사시대부터 부족국가를 이루고 자연적 구릉을 이용하여 그 위에 토성을 쌓은 성지(城趾)였다.(현재 달성은2세기 전후에 축조된 풍납토성과 비슷한 시기 또는 더 앞 선 시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성으로 보고 있으나 그 후 고려, 조선을 거치며 석축으로 개축 하는 과정에서 원형이 많이 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때부터 달성 서씨(達成 徐氏)의 세거지였으나 조선조 세종때 나라에 헌납하였고 임진왜란 와중인 선조 29년(1596), 경상좌우도가 통합되면서 경상감영이 되기도 하였다.1906년 일본의 침략으로 일인들이 신사(神社)를 짓고 대구읍성 철거시 경상감영(현 경상감영공원) 정문에서 관풍루觀風樓, 망경루(望京樓, 현재없음)등을 옮기고 공원화하였던 것을 해방후 1963년 사적 제62호로 공원 조성을 시작, 신사 등을 철거하고 공원으로 정리 조성하였다. 현재 달성공원은 대전동물원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동물원의 하나이면서, 느릅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등의 전통수목과 우리나라 최초의 방사식 동물원, 이상화(李尙火) 시비(時婢), 동학교조 최제우(崔濟愚) 동상, 의병장 허위(許爲) 사적비, 석재 서병오(徐丙五) 선생 예술비, 어린이 헌장, 달성 서씨 유허비 등이 있으며 종합문화관과 1995년에 개설한 향토역사관이 있다 . (1) 관풍루(觀風樓) : 1601년(선조 34년)에 경상감영(慶尙監營)의 정문으로 세워졌던 것인데 1906년(高宗 10) 대구의 읍성(邑城)이 철거될 때 달성공원으로 옮겨왔다. 2층으로 되어 있고 기와를 이은 목조이며, 건평은 17평, 1975年 2月 5日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 시인(時人) 이상화(李相和) 의 시비(詩婢)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상화 시비, 상화(尙火, 이상화의 아호)는 1901年 4月 5日 大邱에서 출생하여 일제의 어두운 시대를 살다가 해방되기 2年전인 1943年 3月 2日 불우한 세대의 삶을 마쳤다. 시비(詩婢)에는 그가 서울 중앙중학을 졸업하고 동인지「백조(白潮)」에 18세 때 발표하여 문단을 뒤흔들었던 시「나의 침실로」가 새겨져 있다. 해방뒤인 1948년 백기만(白基萬) 김소운(金素雲)씨 등의 힘으로 세워졌다. (3) 천도교(天道敎)를 창도(創道)한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의 동상 : 포덕(布德, 天道敎(천도교)의 傳道(전도)를 일컬음 ) 105년이 되는 1964年 3月 21日 그가 순도(殉道)한 대구에 그의 동상을 세운 것이다. 최재우는 대구 장대(將臺)에서 순도했다. 오른손을 풀어 하늘을 가리키는 것은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으로 사람이 하늘을 믿어 끝내는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른다는 것)의 진리를 깨우치는 모습이라 한다. 비문은 박종홍(朴鍾鴻)씨의 글이다. * http://www.daegustory.com / *2 서문시장 : 원래 조선시대, 대구읍성의 북문 밖에 있던 대구장이라 불리던 시장이었다가, 경상감영이 들어서면서 장이 커지게 되었고 서문밖으로 옮겨져 지금의 서문시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약 4000개의 점포가 몰려 한강이남의 가장 큰 장이이기도 한 서문시장은, 조선시대에 개성, 강경과 3대 큰시장이었다. 1923년 천황당이라는 못을 메워서 규모를 확장하게 되는데, 그 뒤 유달리 화재가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1960년에 화재로 전체 시장이 모두 타 버린 적도 있었고, 한 때는 매년 명절이면 서문시장 화재가 단골 뉴스기도 했었지만, 그 후 소방서를 시장안에 지으면서 화재가 잦았다가 몇년 전 큰 화재로 한 블럭 전체가 다 없어지기도 했었던 곳이다. (어른들은 천황당에 빠젼죽은 사람들의 영혼때문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어릴적에 천황당 시장, 시외버스를 타던 언덕은 '천황당언덕'이라 부르는 것을 자주 듣기도 했다.) *3 대구읍성 : 대구는 BC7세기경부터 사람이 산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조선때에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지리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성이 크게 인정되지 못하다가 명군 왜군 등이 대구에 주둔하였거나 통과한 사례가 많아 임진왜란 후에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지면서 (선조34년 (1601) 비로소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경상감영이 이치되면서 명실상부 경상도의 군사 행정중심도시로 발전하게 된 동기가 되었고 또한 경상감영과 대구시민을 위한 방어시설물인 성곽이 필요하게 되었다 . [대구부읍지]에 의하면 최초의 대구읍성은 부사 윤방이 선조 23년(1590)에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선조24년에 완공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선조 23년(1592) 대구를 침공했던 왜군 고시니 유끼나가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후일 영조 12년의 축성비에 의하면 토성유지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토성이었다고 보인다. 석축 방식의 대구읍성은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민응수가 영조11 (1735) 3 월에 발의하여 실현되었다. 축성공사는 영조 12년(1736) 4월 8일에 석성의 돌을 다듬기 시작하여 동년 12월에 성터를 닦고 석축을 쌓기 시작하고 이듬해 6월 6일에 읍성을 완성하였다. 완공된 그해 11월 신축일에 준공식을 감영 선화당에서 개최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 12 (1736) 년 에 부성을 석축한 이후 수성창을 두고 수시로 성곽을 보수했으며 축성 후 134년이 지난 고종 7 (1870)년 에 성벽의 대수리가 행하여졌다. 이때 동서남북 네 문의 문루를 개건 중수하고 성벽 위에 새로 네 개의 누각을 세웠는데, 이들 누각명은 동은 정해루 서는 주승루 남은 선혜루 북은 망경루라 하였으며 또 중간에 4개의 포를 증설하였다. 읍성의 규모는 대구읍지 대구부사례 등 사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축성비에 기록된 성곽의 규모를 영조척 을 기준하여 미터 단위로 산정하여 보면 성의 둘레는 약 2,650미터 성곽의 높이는 서남 약 3.8미터 동북 약 3.5미터 성의 폭은 약 8.7미터 여첩은 819개로 여첩 1개의 길이는 약 3.23미터 이다. 또한 성곽의 동서남북에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과 성벽의 동서에 암문이 각각 1개씩 있었다 이 문들은 석축으로 처음 개축했을 당시 동문을 진동문이라 했고 서문을 달서문, 북문을 공북문, 남문을 영남제일관(현재 동대구IC 쪽 망우당공원에 복원되어 있다)이라 하였고 암문은 두 개가 있었는데 동소문 서소문이라 하였다. http://blog.goz.co.kr/ *4 박중양 ( 朴重陽, 창씨명 朴忠重陽, 1874∼1955? ) : 경기도 양주 출신의 대표적인 친일파의 한 명으로 대구부윤으로 있으면서 일본인들의 청을 받아들여 무단으로 대구읍성을 허문 인물이다. 이토의 양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친일인물로 대구의 3.1독립운동의 앞장서 진압하기도 하였고,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일원으로까지 오른 인물이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반민특위가 해체되며 목숨을 건진 경력이 있음에도 일본의 조선점령이 조선에게는 은혜이며,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던 인물이었다. http://bluecabin.com.ne.kr/split99/pjy1161.htm *5 계성학교 : 1906년 미국 북장로파 선교사 안의와(James E Adams)가 선교사 사택을 임시 교사로 해 개교했던 영남지역 최초의 근대식 사립교육기관이었던 계성학교는 1908년 대구 중구 대신동에 아담스관을 지어 입주한 이래 , 1913년에 지어진 맥퍼슨관, 1931년에 지어진 핸더슨관이 남아있다. 1919년 3월에는 아담스관 지하실에서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신명학교, 경북고와 함께 3월 8일 서문시장의 장날에 맞춰 봉기함으로서, 경북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초대 교장 안의와(한국명, James E Adams) 선교사의 이름을 딴 아담스관 벽면엔 이 학교의 교훈인 ‘인외상제지지본(寅畏上帝智之本)’.- 잠언 1장7절을 한자로 쓴 것으로,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니라’는 뜻-이 새겨져있다. 2000년 남녀공학으로 전환된 계성학교는 특히 문화·예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명문으로 발돋움했다. 계성학교 출신 문인, 예술가들은 한국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는데, 박목월(시인·23회), 김동리(소설가·21회), 김성도(아동문학가·21회), 박태준(작곡가·5회), 현제명(작곡가·8회)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조선 신극의 선구자인 홍해성(연극인·18회) , ‘임자 없는 나룻배’의 감독인 이규환(영화인·9회) 도 계성학교의 세례를 받았다. 근래에도MP3플레이어 ‘아이리버’로 세계시장을 석권한 레인콤 양덕준 사장(56회)을 포함하여, 김용태 전 내무부 장관(41회),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53회),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55회) 등 정계 인사와 신성택 전 대법관(45회), 민주노총 이수호 전 위원장(55회) 등도 이 학교 출신이다. *6 살트로 수녀원 : 1915년 안세화 주교가 Robert신부의 도움을 받아 지은 수녀원이다. 1912년 안세화 주교는 신부를 보좌하면서 고아와 노인을 돌보고 의료사업을 담당할 수녀의 파견을 프랑스 성바오로 수녀회에 요청하였다. 그후 1914년에 수녀의 파견이 결점되자 그는 수녀원 건축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915년 코미넷관의 낙성과 함께 대구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를 세웠다. 건물의 대지는 대구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의 주역이었던 천주교 신자 서상돈이 기증했고 건물의 설계는 Robert신부가 했으며 건축공사는 중국인들이 담당하였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풍에 준 하는 서구식 건물로 서구의 건축양식과 함께 벽돌조적기술을 대구부민들에게 소개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대구 천주교 역사와 건축의 변천사를 담고 있는 건물로 지금까지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