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고느리게
겨울 기차여행의 추억 본문
우리얼 2004.12.01
그냥 하루를 혼자만의 여행을 기대하며 떠난다면 딱 알맞은 것이었다. 물론 여행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결국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어느 길, 어느 시간에 떠나는 것을 선택하더라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가장 좋아하던(?) 시간표였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몇년정도는 '비둘기'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 4시가 조금넘어 동대구역에서 출발하였던 그 기차는 영주역에서 1시간을 쉬었다 다시 출발했었다. 그 1시간 동안 우리는, 짐이며 가방을 기차간에 던져두고 손바닥만한 영주 시내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이른 새벽 김이 새어나오는 집을 찾아헤메기도 하였고, 방금 말아낸 따뜻한 김밥을 한주먹 쥐고 다시 기차간으로 오르기도 했었다. 왁자찌걸하니 젊은 애들의 소란이 불편하기도 할 법 했지만, 나이 지긋한 역무원 아저씨들은 짐을 던져두고 우르르 몰려나가는 우리들을 위해 한번의 꺼리낌도 없이 짐을 봐 주겠노라 했었다.
기차는 영주까지 가는 기차였었다.
하지만, 영주에서 1시간을 쉬었다가 다시 강릉으로 출발하는 통근열차 역활의 기차였었기에, 아주 춥고 바람심한 어떤날들은 아무도 없이 텅빈 열차간을 떡하니 차지하고, 가위바위보로 뽑힌 한명만이 역사로 달려나가, 영주에서부터 강릉까지의 새로운 차표를 끊어오곤 했었다.
텅빈 열차.. 눈이 꽤 많이 온 날은 태백준령의 험한 산길을 예측하여, 평소보다 많은 수의 기차칸을 달았다. 영주역에서 기다리는 1시간동안에 기차는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앞뒤로 새로운 열차칸을 달았다 떼내곤 했었다.
그렇게 짧았던 1시간이 지나면, 다시 강릉을 향한 긴 여행을 시작했었다. 영주에서부터의 길은 태백을 굽이굽이 넘고 헤치며 달리는 것이었다. 전 날의 일기예보에 폭설이라도 예견되었던 날은, 기차의 맨 앞쪽 기관차에 영화에서나 볼법한 눈치우는 판을 뽀족히 달고 달리기를 시작했었다. 이제 막 여명이 묻어오르는 골을, 가끔은 지그재그로, 또 가끔은 숨을 헉헉대가면서 하얀눈을 날리며 참으로도 잘 달렸었다. 봉화, 춘양, 승부... 도계...
태백의 품에 안긴 세상은 허리춤까지 차오르는 눈이었고, 가끔씩 보이는 작은 마을은, 지붕만이 빼꼼히 세상을 향해 따스한 김을 뿜었었다. 마을마다, 향깊은 산나물을 가득 이어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쉼없이 오르내렸고, 따스한 정들이 오고갔다. 모르는 이 없었고, 하나같이 아저씨, 아주머니, 어머니, 아버님 같았다. 그렇게 왁자지껄한 체온들은, 도계나 동해에 다다르면 썰물처럼 열차칸을 비워나갔고...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기차칸엔 나만 덩그랗게 남았었다.
가끔은 작은 메모수첩 하나만 들고 그 길을 나섰고, 또 가끔은 마음에 맞는 후배들 서넛.. 대여섯명을 깨워 새벽길을 나섰다. 무슨 병이라도 앓고 있는 것 같이, 겨울이고 눈이 내릴때즈음이면 꿈속에서도 그 하얀 정경들과 굽이지는 골과, 왁자지글함과 적막함이 밀물과 썰물처럼 몰아치던 기차칸이 미칠듯이 떠 올랐었다.
그때의 열차는 요즈음의 지하철처럼 양쪽으로 앉는 것이었다. 그 양쪽 자리를 골짜기마다, 웃는 낯으로 새로 오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내주며, 누구네 송아지가 새로 났다니, 누구네가 눈에 갖혀 마을사람들이 함께 길을 터러갔다니, 누구네 딸네가 봄이오면 객지의 참한 총각에게 시집 간다니..하던 소리가 동화처럼 들리는 열차였다. 긴 열차는 칸칸마다 밖으로 향한 문이 열렸고, 달리는 열차의 칸에 매달려 꾸불꾸불 잘도 따라오는 기차의 뒷꼬리와 왕구슬만했던 눈송이를 손으로 잡아가며 달리는 짜릿한 즐거움을 선사했었다. 가끔은 제일앞 기관차의 숨에 찬 헉헉거림의 뛰거운 기운이, 입김처럼 문틈에 매달린 내 얼굴을 훝고 지나가기도 하였고, 밤새 내린 눈들을 밀어낸 기관차의 제설기에 채어나온 부드럽고 하얀 눈송이들이, 맨손으로 매달린 내 손등을 간지럽히며 뒤로 사라져 가기도 했었다.
봉화를 지나고 동해을 향해 갈 즈음엔, 골짜기는 붉은 기운의 황금빛으로 가득차오르곤 했다. 산줄기 너머 어딘가에 분명 숨어있을 아침해는, 아직 얼굴을 좀처럼 내보이지는 않으면서도 금빛의 따스한 기운을 온통 골짜기에 던지며, 가끔씩 날려드는 눈가루와 기관차의 하얀 숨소리도 색색으로 물들여 버리고선 시침을 떼며, 뒷쪽에서 또는 옆에서 불쑥불쑥 얼굴을 보였었다.
그랬었다..
모든게 그림 같았고, 전부가 시처럼 아름다웠다. 수십명과 함께 길을 나서도, 나는 늘 그 광경이 사라지고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때까지도 혼자만의 그림속에서 혼미했었다.
태백준령을 넘어 이윽고 기차가 동해바다를 끼고 달리기 시작하면, 겨울의 바람과 하늘과 바다가 원래부터 하나였음을 증명해보이는 그림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하늘과 바다는 바람으로 인해, 그 경계의 구분이 얼마나 덧없는 일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고, 우렁대는 바람과 한 목소리로 요동치는 파도는, 달리는 기차의 숨소리쯤은 갓난 아기의 울음처럼 만들어버리곤 했었다. 그 미치도록 장엄한 광경이란...
정동진..을 거처 강릉에 도착한 우리는, 배고픔도 잊어버린채 얼마나 오랫동안 울렁거림에 혼미해야 했었던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국수 한그릇에 배를 불리고서는 다시 대구로 향하는 그 비둘기에 올라타고 여행을 시작했었다.
이젠... 밤이다.
골마다 아침과는 사뭇 다른 붉은 기운을 던지고 눈깜박할 사이에 바람처럼 휙하니 사라져가는 골짜기의 발빠른 햇살에 얼마나 놀랐던지..
태백산의 밤은 참 고요하다. 아침이 올때의 부산함과 따스한 기운은 언제그랬냐는 듯이 시침을 떼고 돌아앉았고, 오로지 좁은 강과 산턱을 비추며 달리는 기차의 네모난 불빛들만이, 그 곳에 산이 있고 골이 있음을 알려줄 뿐이다. 기차안도 고요하다. 깊이 가라앉은 세상마냥 나지막하게 잠들어있다. 가끔씩 열차가 설때 생겨나는 부산함도, 산골의 저녁햇살처럼 빠르게 잦아들고, 사람도 기차도 산도 강도 모두 하나처럼 고요를 깨우는 어떤 일도 용납하지 못한다는 듯이 재빠르게 원래의 정적을 찾아갔다.
밤 10시..쯤.. 하루내내 귀에 익었던 기차의 울렁임이 거짓말처럼 오래 멈추어서면, 이윽고 다시 도시였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바져나간 열차칸을, 나는 늘 아쉬운 듯 끝까지 남았다가 무언가 빠뜨린 물건이 있는냥 한바퀴 돌아보고, 어렵게 플랫폼에 내려서곤 했었다.
도시의 밤공기는 늘 추웠다. 종종거리는 사람들과 빵빵대는 자동차의 번잡스러움속에서 나는, 길 잃은 어린애마냥 한참을 서 있어야만 했었다. 마치 세상속으로 ... 처음 내던져진 사람처럼... ...
그립다. 그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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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무궁화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새벽기차를 타면, 영주에서 태백으로 향하는 통근열차를 갈아타고 눈내린 태백의 까만 강들이 아침과 함께 반짝이는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지금은 통근 열차도 많이 없어진 것 같다. 영주에서 태백.. 그리고 정선에서 태백으로 향하는 기차가 한개씩 남아있는 것 같다.
① 동대구-강릉/05:40-12:15 -> 영주(02:30분?) -> 강릉-동대구/15:35-02:10 영주(03:30분?) -> 태백(통근열차) ② 동대구-강릉/15:30-22:12 -> 강릉-동대구/06:00-12:36 ③ 동대구-강릉/23:37-07:07 -> 강릉-동대구/13:35-20:47 또는 강릉-동대구/15:35-22:10 |
동대구(05:40) 하양 북영천 신녕 화본 탑리 의성 안동 옹천 영주(08:13) 봉화 춘양(08:57) 임기 승부(09:41) 석포 철암 통리 도계 신기 동해(11:29) 묵호 정동진(11:59) 강릉(12:15)
부산(22:15) 구포 삼랑진 밀양 동대구(23:35) 대구 왜관 구미 김천 상주 점촌 용궁 예천 영주(02:43) 봉화 춘양 임기 승부 석포 철암 통리 도계 신기 동해(05:58) 묵호 정동진(06:36) 강릉(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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