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고느리게
나주 가는 길 본문
우리얼 2007.12.01
일주일내내 이어졌던 야간작업과 연이은 출장의 여파가 몸에 스며들었나보다. 기침으로 잠 못 이룬 지난 새벽이 있었기에, 약속을 자꾸만 취소하고싶게 만든다. 사람들이 몇 명이었던지? 가물거리는 정신에 그래도 가야겠다 싶어 물먹인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겨우 추스렸다.
아침 8시 30분. 약속시간에 맞춰 회사에 도착해서 뒷 칸에 있던 짐을 사무실에 올려두고 사람들을 기다리는데 자꾸만 목이 아파온다. 9시쯤이나 되었을까 도착한 사람들과 함께 어디로 갈 것인지를 의논한 끝에 운주사부터 가 보기로 하고 출발을 했다. 반가운 사람들의 기운이 지난 새벽의 감기기운을 조금은 덜어주는 것 같다. 날씨도 생각보다는 맑다.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좋은 사람들이 주는 따뜻한 기운을 담고 달린지 한 시간여, 문산휴게소에서 잠깐 쉬고나서 다시 길을 나섰다. 문산휴게소에서 일정을 조금 수정하여 가는 길에 있는 대원사 티벳불교박물관을 거쳐가기로 했다. 다시 한 시간여를 더 달려 주암IC를 통과해 주암호를 한바퀴 돌며, 유피님이 알고 있다는 고인돌공원 앞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지만, 아쉽게도 주인할머니의 병환으로 식당을 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다른 식당을 추천받았다. 남도에 들어 선지 한시간도 안 되었지만, 푸짐하고 걸죽한 남도식 매운탕에 다들 입맛이 동했는지, 차에서 계속 먹었던 간식으로 더 이상 먹을 배가 없다던 사람들도 밥 한그릇을 뚝딱 비워내고 간식꺼리까지 챙겨 길을 다시 나섰다.
사람의 탯줄길이와 같다는 대원사 입구 15리길... 봄 날 눈처럼 흩날리던 벚꽃도, 가을날을 눈부시게 만들었던 낙엽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 곳에서 우리는 죽음과 삶이 별개이지 않은 인생을 보았고, 밀교의 영향이 다분한 여러불상들과 주검이 남긴 흔적들을 만났다. 몇 년 전 심란한 마음을 안고 길을 나섰다가 들렀을 때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서였을까? 다시 찾은 박물관은 지난 여행의 감흥만큼 깊은 느낌을 주지 못한다. 하긴, 눈처럼 하얗게 날리는 화려한 꽃잎들을 헤치며 15리나 되는 길을 달려온 후, 갑자기 마주친 죽음의 의식들이 주던 생경함이 얼마나 컸었던가?
마음속에 자꾸만 치밀어오르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늘을 채운 룽다와 태아령과 지장보살의 사찰, 대원사를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대원사 - 주암호변에 위치해 있으면 주암호에서 대원사까지의 15리 길은 벚나무터널로, 봄이나 가을엔 환상적인 길이 된다. 대원사는 신라때의 고찰이지만, 현재는 태어나지못하고 생명을 잃어버린 아기들의 위한 절로 가꾸어져 있다.
티벳불교박물관에서의 일정이 생각보다 늦어져 운주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었고, 철천리 미륵사로 향했다. 미륵사에는 보물461호로 지정된 사면 칠불석상과 보물 462호로 지정된 높이 5m가 넘는 석불입상이 있다. 석양이 아름답다는 답사안내서의 말만 믿고 시간을 다투어 달려갔지만, 석양보다 더 아름다웠던 부처님의 모습에 만족해야만 했었다.
철천리 미륵사 사면칠불석 - 보물461호
해거름이 시작된 길을 재촉하여 영산포구에 도착하니 이미 해는 서쪽하늘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영산포 특산인 홍어요리를 맛보겠다는 일념으로 달려온 길이었다. 식당주인의 추천대로 홍탁삼합, 홍어찜, 홍어무침회, 홍어애 회, 그리고 홍어튀김과 전, 찜과 보리애국까지 연이어 나오는 홍어코스요리를 시켜놓고 보니 경상도 사람들답지 않은 식성들을 보인다. 다들 생각보다 먹성이 좋다. 입 천장이 데이도록 먹고 난 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직 도착하지 않는 일행들을 기다리며, 영산포구를 가르지르는 다리를 걸으며 영산포구에 대한 이야기를 곁들이다보니 광주에서 출발한 일행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영산포의 홍어회 정식 - 홍어삼합,홍어무침회,홍어애 회, 홍어튀김, 홍어전,홍어찜,보리애국
숙소는 남고문 근처였다. 잠깐의 인사가 오가고, 답사자료집이 나누어지고 부른 배를 두드리던 사람들이 다시 먹거리를 장만한다. 준비해 온 감자전이 부쳐지고, 굴국도 준비되었다. 오가피주와 생탁이 어울러진 술자리가 파해도, 사람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들이 새벽까지 이어지며 첫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 둘째날
8:30 아침
어스럼한 창문가로 노란색이 어른거린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자욱한 안개사이에 은행잎이 바람을 타고 있었다. 옷속을 파고드는 한기에 목을 움츠리다가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으러 나섰다. 식당은 숙소 바로 앞. 푸짐한 반찬에 걸죽한 곰탕국물이 일품인 콩나물국과 김치찌게로 아침을 해결하고, 드디어 답사를 시작했다.
9:00~ 안개 자욱하던 심향사와 낙엽이 소리내며 떨어지던 나무들.
고운 여승들이 있던 곳. 동안거 기간중이어서 대웅전을 들어가보지 못하고 나왔다. 미륵원(彌勒院)이라는 이름으로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유래깊은 절이었지만, 그 깊은 유래를 보여주는 것은 언듯보아 아름드리 고목뿐이라는.. 경내에 남아있는 삼층석탑을 비롯해 북문밖 3층석탑(보물 제50호)등과 함께 미륵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불좌상과 고려 13~14세기 경에 조성되어 고려말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극락전의 아미타여래좌상(건칠불, 지방유형문화재 제99호)등이 있어 고려시대의 불교문화를 잘 보여주는 사찰이라고 하지만, 새로 지은 건물들로 하여 그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9:30~ 다보사 , 올라가던 길의 물안개 피어나던 호수
원래 다보사는 보물1343호로 지정된 괘불(羅州 多寶寺 掛佛)이 있었는데, 현재는 나주시 향토문화관에 옮겨져 있다고 한다. 올라가는 길의 호젓함이 데이트 코스로도 안성마춤인 것 같다. 가파른 길을 꼴불꼬불 오르다보면, 갑자기 환해지며 이름처럼 색색 고운 단풍이 손님들을 맞는다. 그리 크지 않는 절간들은 계곡을 거쳐 능선을 타고 나누어져 아담한 모습을 보인다. 주차장쪽에 절을 막고선 새로지은 건물 탓에 원래의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저린 것이 못내 아쉽지만, 중생들을 위한 종교기관으로서의 사찰의 본래 목적을 생각하면 그것을 탓하기도 어려운 것 같다.
10:30 나주 석당간
영산포항을 오르내리던 배들을 보호하고 행주형 도시인 나주의 번성을 위해 동문밖에 세웠다는 비보형 당간지주인 석당간을 보러갔다. 해체복원 중으로 전체모습은 보지 못하고 아래쪽 대만 남아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보물 제49호로 지정된 나주 석당간은 보통의 당간이 사찰에서 법회를 위한 당(幢)을 걸기 위해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나주시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세운 비보형 당간지주라고 한다. 기록에는 [동국여지승람] 나주목 고적조에 "처음에 주(州)를 설치할 때 나주의 지형이 주형(舟形)인 까닭에 그 안정을 빌기 위하여 동문밖에는 석장(石檣)을 동문 안에는 목장(木檣)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비보를 목적으로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1872년에 그려진 나주목지도에는 나주읍성의 동문밖과 안쪽에 똑 같은 모양의 석장과 목장이 그려져 있어 당시까지도 돗대역활을 하던 석장과 목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현재는 주민들이 나무전봇대를 이용하여 없어진 목장을 1958년에 복원해 놓았다고...
10:50 복원된 동점문(동문)을 보러감
1973년애 복원한 나주읍성의 남문인 남고문과 더불어 최근에 복원한 동점문. 전라도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물산과 인재의 도시 나주의 옛명성을 복원하는 뜻에서 시작한 사업이라고 하지만, 시멘트를 덧붙여 복원한 모습에 씁씁함을 먼저 든다.
11:00 ~ 박경중 가옥
약이 떨어져 새로 약국에서 사 먹은 감기약의 약기운이 돌기 시작했나보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어지럼증과 함께 무력증이 찾아온다. 사람들은 20세기 초의 걸친 나주 지방 상류주택의 구조가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는 박경중 가옥을 보러 갔다. 현재는 안채를 비롯하여 초당(草堂), 바깥사랑채, 아래채, 헛간채, 바깥행랑채, 문간채 등 총 7동으로 이루어진 이 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초당으로 박경중의 6대조가 지었다고 한다. “광서십년갑신구월(光緖十年甲申九月)……”으로 기록된 상량문이 있어 고종 21년(1884)에 건축되었다는 기록을 알 수 있고, 안채는 4대조가 1910년대 초에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안채 상량(上梁)에는 “조선개국오백사십삼년갑술십이월이십일일신축시상량(朝鮮開國五百四十三年甲戌十二月二十一日辛丑時上梁)” = 1943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당시 안채 건립 후 계속 집안에 불운이 겹쳐(집터의 기가 너무 세기 때문) 상량만을 교체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래채는 정사년(丁巳年)(1917)에, 바깥사랑채는 1930년대에 만들어졌고, 헛간채는 안사랑채를 헐은 재목으로 1957년 지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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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남고문, 나주목사, 금성관(나주객사)
나주향교 : 아침에 먹은 약기운이 돌기 시작해서인지 정신을 흐리게 만든다. 한결 따뜻해진 햇살을 받으려 차에 앉아있다 겨우 몸을 추스려 향교의 넓은 뜰을 거닐어 보았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성전이 인상적이었던 나주향교는 고려 성종6년(987) 8월 12목에 향교를 설치할 때 창건되어 조선 태조 7년(1398)에 중수된 것으로 현재의 건물은 조선중기시대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본전인 대성전만 남아있고 좌우로 딸렸던 건물들은 복원 중이었다. 성종11년(1480)에는 교생 9인이 동시에 과거에 급제하는 경사가 있어 당시 교수로 있던 박성건이 금성별곡을 짓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앞마당에 시비가 서 있고 향교의 왼쪽 길 건너에 그를 기리는 문학관이 자리잡고 있다. 나주향교의 원래건물은 명륜당 대성전 동·서무 동·서재 내신문 외신문 교직사 총효관 보전각 하마비와 함께 1958년에 없어졌다는 계성사 사마재 충복사 수복청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충복사란 건물은 다른 향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선조30년(1597) 정유재란때 당시 대성전의 수복이었던 김애남(金愛男)이 성묘(聖廟)의 위판을 안전하게 금성산으로 옮겼다가 조용해지자 다시 대성전에 모신 공을 세우자 조정에서 김애남을 복호(復戶)시키고 그가 죽자 충복사란 사우를 건립하여 제사를 지내주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사우가 오래되어 1922년 폐허되자 1924년 2월 향교앞에 유허비를 세워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향교의 왼쪽 길건너에 자리한 나주문학관은 박성건의 금성별곡을 기념하여 지은 것이다. 경기체가는 고려 중엽부터 학자들 사이에서 불려진 장가(長歌)의 한 형식으로 끝에 '경긔 엇더하니잇고(景幾何如)' 라는 구를 붙이기 때문에 '경기체가' 또는 '경기하여가'라고도 하며, 제목에 '별곡'이라는 말이 붙어 있어, 속요의 '청산별곡' 등과 구별하기 위해 '별곡체'라고도 한다. 경기체가의 대표적인 작품인 금성별곡은 정극인의 불우헌곡과 함께 경기체가의 대표작으로 박성건이 금성향교의 교수로 재임중이던 1480년(성종11) 생도 10명이 생원·진사과에 급제하는 경사가 있어 이를 축하하기 위해 지은 6장의 시조로 되어 있다.금성별곡은 나주의 산천경계와 인물의 빼어남, 향교유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 관리의 선정, 급제자의 명단과 이를 기뻐하는 모습 등을 읊었는데, 현재 나주향교 뜰에 시비가 서 있다.
금성별곡 중 / 제1장 海之東 湖之南 羅州大牧(해지동 호지남 나주대목) 바다의 동쪽인 해동·湖의 남쪽인 호남의, 나주는 큰목사가 다스리는 고을로, 錦城山 錦城浦 亘古流峙(금성산 금성포 긍고류치) 錦城山이 우뚝 솟고·錦城浦로 흘러가는 물과 함께 영원히 변함없는 산천이로다. 爲 鍾秀人才 景幾何如(위 종수인재 경기하여) 아! 빼어난 재주있고 놀라운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千年勝地 民安物阜(再唱) (천년승지 민안물부(재창)) 아득한 옛날부터 경치좋고 이름난 곳, 백성들이 편안하게 삶은 물산이 풍성함이니, 爲 佳氣蔥籠 景幾何如 위 가기총롱 경기하여 아! 아름다운 서기가 푸르고도 성한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
12:30~ 점심 나주식 곰탕(하얀집)
읍내 장터였던 매일시장 뒷 편 향교 앞으로 늘어선 나주곰탕집 중 가장 유명하다는 하얀집에 들러 점심을 해결했다. 소를 잡고 난 뒤의 부산물인 머리고기와 뼈, 내장등을 이용하여 읍 장에서 팔던 장국밥 일명 "곰국"이 나주곰탕의 원조라고 하는데, 처음엔 호랑이할머니, 오씨가게, 하얀집등에서 팔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 현재의 하얀집, 남평집,노안집에서 곰국을 맛있게 개발하자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으면서 자연스럽게 "나주곰탕" 이라 불리워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큰 가마솥들이 늘어서 있고, 거기엔 하얗게 우려낸 사골국물이 보글보글 끓고있었고, 경상도 식과는 달리 시원한 국물에 그릇을 가득채운 소고기편육이 입맛을 ㄷㅜㄷ운다. 김치가 맛있다고 두번씩이나 그릇을 바꿔가며 먹는 일행들 사이에 앉아있으면서도 다른 곳에 손이 쉬 가지 않는걸 보면 아침에 먹은 약기운이 아직 다 풀리지 않는 것 같다.
13:30~ 덕산리고분군 /반남고분군
반남고분군은 주산인 자미산을 사이에 두고 덕산리, 신촌리, 대안리고분군을 통털어 이야기하는 것으로 삼국시대와 토착세력이었던 마한(馬韓)시대에 걸쳐 조성된 고분군이다. 당시의 특색이 잘 드러나는 옹관묘가 대부분이지만, 석실분도 있다고 한다. 경주의 고분과는 다르게 장방형이나 방대형 고분군과 함께, 고분을 둘러싸고 도랑이 있어 이채롭다. 파란하늘과 맞닿은 고분에 올라 잠시 마지막 가을 햇살을 즐겼고, 주차장에서 잠깐의 간식시간을 가졌다.
반남고분군의 장방형 고분
14:30~ 복암리 고분군
자미산을 기준으로 덕산리 고분의 반대쪽에 위치한 복암리 고분. 싹이 오르기 시작한 넓은 보리밭은 봄 날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어른거리게 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박경리의 '토지'의 무대였던 하동 평사리와 비슷한 감흥을 주는 곳이었다.
15:30~ 오늘 답사의 마지막 코스인 영모정으로 출발
구진포에서 영산강변 도로를 따라 회진마을 언덕에 위치한 영모정은 백호 임제의 고향마을이라고 한다. 중종15년에 중종 15년(1520) 귀래정 임붕이 건립한 정자로 초기에는 호를 따 「귀래정」이라 불렀으나 명종 10년(1555) 후손이 재건하면서 「영모정」이라 이름을 바꾸었한다. 영모정을 오르는 길에는 평안도 부사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 묘에 들러 그녀를 기리는 시를 지어 파직을 당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백호 임제의 시비가 서 있다. 시비 앞에서 어린시절부터 시와 절기에 능했다는 임제선생의 풍류에 얽힌 이야기와 당시 유명한 평양기생인 '한우'와의 풍류를 들으며 영모정으로 올랐다.
* 북천이 맑다커늘 / 우장없이 길을 나니 / 산에는 눈,들에는 찬비로다 / 오늘은 찬비(한우) 맞았으니 / 얼어잘까 하노라 - 임호
* 어이 얼어자리 므스일 얼어자리 /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두고 얼어자리 /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 녹아잘까 하노라 - 한우
14:00~ 정리: 백호와 그의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끝으로 답사는 끝났다.
이제 돌아가야 할 길. 다들 아쉬운 마음에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새롭게 알게된 나주에 대한 감흥과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하며 하루동안의 나주의 시간속으로 걸어들어갔던 일정이 끝나고 있었다.
* 돌아오는 길은 광주로 해서 호남고속도로를 탔다. 광주까지의 정체로 한시간이 넘는 길을 추가해야했고, 다시 문산부터 밀리기 시작한 차량의 행렬로 국도를 타고 우회해야했다. 지친 사람들은 모두 잠에 빠졌었고, 혼자 어두운 길을 달리면서 이틀낮 하루밤의 여행을 생각한다. 전 날, 죽음에 대한 성찰을 하게 만들던 대원사에서 다시 천여년전의 고분군까지, 호남의 가장 왕성한 물산과 사람의 집결지였으며 당시 가장 화려했던 도시였던 나주를 향하며 공교롭게도 우리는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길을 밟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가장 화려한 삶이 북적이던 도시, 가장 어두울 것 같은 죽음. 사실 길을 떠나며 보았던 죽음에 대한 생각들은 세상의 상식과는 많이 달랐다. 수천년전의 고인돌, 그 호수를 돌아, 새로운 깨닭음의 생을 준비하는 티벳의 죽음, 그리고 태어남을 이루지 못한 영들을 위한 기도들, 천여년전 화려한 문화의 주인이었던 큰 무덤의 주인들, 그럼에도 죽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지지 않는 티벳의 주검들과 죽어서도 천년의 시간을 넘어 화려했던 장식과 큰 무덤을 남긴 주인들. 대조되는 많은 것들이 하나인듯, 따로 둘인마냥 다른듯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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